짤린 이유 : 씬 자체는 마음에 들게 나왔지만 도저히 앞 뒤 상황을 연출하기 힘들어서 + <푸른 어둠, 황금의 꽃>의 스포 같아서 컷.

 

 

**

 

 

 그가 그녀를 돌아본 순간, 릴레스는 온 몸에 긴장감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 곳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남자는 분명 그녀의 남편이었다. 윤기있는 흑발을 깔끔하게 넘긴 스타일과 살짝 흘러 나온 잔머리 사이에서 빛나는 푸른 눈동자. 미미하게 웃고 있는 입술 아래로 이어지는 남자다운 목젓과 근육으로 꽉 조여진 탄탄한 몸매. 그것을 감싸고 있는 맵시있는 옷 매무새까지.

 하지만 릴레스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남자는 그녀의 남편이었지만, 남편이 아니었다. 그는 마치 이제 막 사냥을 끝내고 여유를 되찾은 육식 동물처럼 잔인하면서도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건 릴레스가 아는 남편의 모습이 아니었다.

 발트는 그런 릴레스의 속내를 보고 있는 것처럼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당황을 이해한다는 듯이 너그러운 표정이었지만, 어딘가 무서운 기색이 서려있었다.

 "그대도 눈치 챘으리라 생각합니다만..."

 발트가 손을 뻗어 릴레스의 뺨을 어루만졌다.

 "저는 그렇게 착한 성격이 아닙니다. 그 단어는 저와 가장 거리가 먼 언어이지요. 필요하다면 상상도 못한 끔찍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를 수 있는 자가 그대의 남편입니다. 이 손에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이 스며들어 있는지 순수하고 여린 그대가 헤아릴 수 있을까요."

 그의 목소리는 시라도 읊는 사람처럼 부드럽고 침착했다. 그러나 알 수 없이 소름끼치는 기색은 말의 내용과 닮아있었다. 릴레스는 점점 눈시울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발트는 그것을 보고 인상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내 표정을 풀고 다정하게 달래려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저를 경멸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무서워하신다면 그것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순간, 그의 푸른 눈에 격렬한 빛이 떠올랐다.

 "그대가 저에게서 도망치려 한다면 저는 이보다 더 잔인해질 수 있습니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그대를 찾아낸 뒤에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둬놓고 죽을 때까지 저만 바라보게 만들테니 각오하십시오."

 기어코 맺힌 눈물이 넘쳐 뺨을 타고 흘러내려갔다. 눈물의 발트의 손에도 닿았지만 그는 손을 거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격렬한 감정을 품은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잡아먹을 듯이 보고 있었다.

 릴레스는 떨리는 손을 들어 제 뺨을 어루만지고 있는 손에 가져갔다. 그의 손은 그가 뱉는 말처럼 차가울거라는 예상과 달리 뜨거웠다. 따뜻하다못해 생생하게 맥동치는 열기.

 그녀가 처음에 사랑한 것은 신사적이고 상냥한 발트였다. 이렇게 초라한 그녀에게도 황홀한 칭찬을 해주던 아름다운 남자. 그러나 막상 그를 가까이 하자 상냥한 신사의 모습 아래 문득문득 느껴지는 음침한 기색이 있었다. 그녀가 갖고 있던 이미지와 어긋나면서도 막상 보면 묘하게 그의 인상에 어울리는 어두운 그림자 같은 기색.

 호박색 눈동자에 발트가 비친다. 지금 눈 앞에 있는 발트는 그녀가 그렇게 느꼈던 모습의 발현이었다. 여태껏 그녀를 향한 다정함 아래 웅크리고 있던 그의 진짜 모습인 것이다.

 "발트."

 ...아아, 나는 얼마나 끔찍한 여자일까.

 발트의 손을 잡고 거기에 맡기듯 얼굴을 기대자 희미하게 웃음이 떠오른다. 순수하고 여리다고? 발트의 눈에 비치는 자신이야말로 거짓이다. 릴레스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방법을 모른다. 때문에 그녀는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기쁨이 얼마나 생생한지 고스란히 알 수 있었다.

 이런 그를 볼 수 있는 건 자신뿐. 오로지 자신만이 볼 수 있는 그의 진짜 모습에 환희를 느끼는 나는 얼마나 무서운 여자인걸까.

 "저는 도망치지 않습니다. 발트가 좋아요. 발트가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 일을 해왔는 지 모르지만, 그래도 항상 곁에 있고 싶어요."

 푸른 눈동자는 동요가 없다. 그저 위험한 빛을 지우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볼 뿐이다.

 "피와 눈물을 묻혀야 하는 삶이라면 저도 함께 하겠어요. 그게 발트님의 길이라면 기꺼이 같이 걸어가겠어요. 저는 발트의 아내로 평생 살아갈 거에요."

 "...진심이십니까?"

 릴레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틀어 제 뺨을 감싸고 있는 손에 입을 맞추었다.

+ Recent posts